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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정치

2012.03.13 02:00 : 300

99%정치삶을복원하는방식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지은이 이택광 (마티,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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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목을 당하는 순간, 그 병사 개인은 집단을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의 원인으로 낙인찍힌다. 이 상황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병영생활을 잘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그 해당 병사의 병영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결된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다

 세계의 정치상황이 초국가적인 국면으로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도 한국의 진보진영은 여전히 일국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남북관계는 북한의 오류를 비판한다고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국제정치 상황을 진보진영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몇 년 전 청년실업 문제를 다룬 한 토론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진경도 비슷한 논조의 주장을 펼쳤다.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의 대세이기 때문에 이 자체를 거부하는 투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 기술’ 자체가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도 자본 축적과 실업이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그 발전의 주역인 노동자는 일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 공공연한 자본주의의 비밀이다.

희망버스에 대한 비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진보’의 투정에 대한 훈계처럼 들린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세상 물정이라는 것이 톡 까놓고 말해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계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르고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한다며 호통치는 우파의 논리를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소중한 세계경제를 망치는 주범들이 호통을 쳐대는 당사자들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최소한 장하준이나 그로처럼 중도적 입장을 취하더라도, 비판받아야 할 당사자는 희망버스를 타고 간 시민들이라기보다, 한진중공업 경영자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과도한 경제주의 관점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경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회 기획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경제문제와 관련 있다. 이념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가 북한일 것이다. 경제정책 실패가 어떻게 이념을 왜곡하는지 과거의 역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학습효과로 인해 경제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경향이 정치의 관점을 압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자체와 혼동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치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귀결점으로 생각할 때, 모든 정치의 결과물은 대의민주주의로 수렴돼야 한다는 입장을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선거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야권통합 후보’에 대한 강박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겠다. 기존 정당정치에 기반을 둔 정치공학이 정치 자체를 대체하는 상황이 대의민주주의의 범주를 벗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것이 만성화됐을 때 기존 정당정치를 벗어난 정치를 과잉으로 치부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권을 곧 사회 기획의 실현으로 착각하는 것이 정치의 가능성을 하나의 결과로 수렴하는 문제를 초래한다. 정치가 하나일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논리 구조가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이유 없는 정치, 하나로 재현되지 않는 정치, 설명할 수 없는 정치 따위를 정당한 절차를 위반하는 ‘떼쓰기’로 규정하는 경향이 이를 통해 생겨난다. 따라서 모든 정치는 집권이라는 단일한 궤도로 들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만 많은 ‘평론가’나 ‘입진보’로 싸잡아 비난받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사물과 동일시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최초로 지적한 이론가는 루카치였다. 이런 현상을 루카치는 ‘물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는 ‘소외’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노동자는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와 자신을 무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목격하는 자유주의자의 상상과 달리, 그렇게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자는 이 물화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루카치의 견해다.

이 객관적 인식이 그냥 인식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 상황은 복잡해진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먹고사니즘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인식 차원에 머문 물화의 존재감은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로 흘러서 결국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를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성은 이런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객관적 인식과 조우하는 주체의 차원이 이 지점에서 절실한 것이다.

희망버스는 객관적 인식으로 본다면, 아무런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과잉의 정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국가’에 대한 대책 없는 자기주장이라는 측면에서 ‘순수 정치’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국면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정당정치는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학을 유지할 뿐이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질서를 해체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는 이 상황을 언제나 정치공학이라는 위계질서에 묶어두려고 한다.

정치공학의 위계질서에서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과거에 권력이 노동자를 ‘근로자’라는 개념으로 전유하면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존재’와 노동자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면, 지금은 노동자 스스로 ‘노는 존재’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계화는 거기에 적합한 삶의 양식을 강요한다.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에서 노동자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허락받지 못한다.

안철수 신드롬이 놓여 있는 배경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전자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비난해온 우파 정치의 이데올로기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가를 선출해야 한다거나, 일만 잘한다면 부정부패 따위는 상관없다고 주장해온 정부 여당의 프로파간다가 안철수 신드롬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다. 노무현 정부의 ‘정치’를 거부하고, 이명박 정부의 ‘실용’을 선택한 지난 대선의 기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서 이명박 정부가 기치로 내걸었던 ‘실용’이라는 개념은 ‘일 잘하는 행정가’라는 실천적 내용을 갖고 있었다.

등록금 인상이 천문학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한 '대학개혁'과 무관하지 않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 개혁은 말 그대로 대처정부가 추진했던 영국식 대학개혁모델을 그대로 이식해서 '될 대학만 밀어준다'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영논리로 대학을 지원금이라는 당근과 구조조정이라는 채찍으로 포섭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공재로 인식되었던 대학교육은 밑도 끝도 없는 '시장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상품'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대학생을 '소비자'로 지칭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동시에 <중앙일보>의 대학평가가 실시되면서 대학순위를 정하는 치킨게임이 벌어졌다. 아무런 객관적 평가기준도 없이 세간의 '주관적 대학순위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베껴놓은 이 '날로 먹는' 대학평가는 노무현 정부의 대학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리면서 순식간에 더럽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권위'를 획득했고, 적절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대학의 경쟁력을 표시해주는 객관적 데이터로 둔갑했다.

이런 개혁드라이브로 인해서 대학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말만 '사학'이지, 재정이 부실한 재단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실정에서, 정부 지원금과 등록금이 없으면 존립하기 어려운 대학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대책없이 부실사학이 늘어난 건 전적으로 김영삼 정부의 책임인데, 마구잡이로 늘어나서 골치덩어리가 되어버린 사학을 정리하기 위한 방안으로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정책이 노무현 정부 시절 힘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대학정원은 곧 해당 대학의 수입원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노무현 정부는 대학정원과 교육특성화지원금을 틀어쥐고 대학을 '공정한' 경쟁구도로 내모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서, 이때 얼마나 많은 사학들이 들고 일어나서 노무현 정부 반대 데모를 했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경쟁구도로 내몰린 대학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출산률 저하에 따른 '학령인구감소'라는 거부할 수 없는 파국의 도래였다. 등록금이 유일한 수입원인 구조에서 입학생의 감소라는 절대적인 현실은 대학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대학은 미래에 대한 대비라는 명목으로 등록금 수입 일부를 '적립금'으로 비축하는 편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안에 대해 대학의 등록금 유용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수준을 넘어선 구조적인 고찰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지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고비용 대학교육의 현실은 사학비리를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혁모델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일부 나쁜 사학을 정리하기 위해 도입한 시장경쟁주의는 대학교육 전체를 시장논리에 따라 재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형국이 벌어진 것이다

대학을 압박해서 반값 등록금을 실현한다면,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우파가 얻을 이익은 상당할 것 같다. 일단 대학이라는 공간을 시장의 바깥에 위치시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명분을 해체할 수 있다. 구조조정이 탄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센 놈이 모든 것을 다 먹는 독점화가 정당성을 획득할 것이다. SKY와 '인 서울' 대학 몇몇을 제외한 이른바 '지잡대'는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모두 정리될 것이고, 대학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대처리즘을 위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속적으로 지식인의 본거지인 대학을 무력화시켰는데, 한국의 우파 또한 이런 전략을 아무런 성찰 없이 받아들여왔다. 어떤 것에도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지식인이라는 중립지대는 이념을 떠나서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의 개혁에 이질적인 존재이다. 대학을 기업화해서 얻는 효과는 이렇게 '비(반)시장적인' 지식인 집단을 '무능한 자들'로 낙인 찍어서 지식인이 제기하는 공론을 '쓸모 없는 헛소리'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등록금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대학교수 월급에 대한 시비가 따라붙는 것만 보더라도, 이런 이데올로기적 프로퍼갠더가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대결구도를 '교수 대 학생'으로 몰고 가는 이와 같은 단세포적인 발상이 여전히 공론장에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더라도, 대학 등록금을 둘러싼 쟁점이 복잡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자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다.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를 감안하건대, 우파가 의도하는 대로 대학구조조정이 이루어졌을 때, 그 후과는 반값 등록금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등록금 인하는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고, 실제로 '될 대학만 밀어주자'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계속 힘을 받게 될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 추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과정은 결국 시장을 핑계로 공공재의 성격을 가진 교육을 자본의 논리로 바꿔치기 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아마도 대학의 상징자본에 근거한 기업화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과연 이게 교육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일까? 본질적으로 대학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조직을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교육을 위해서 정당한 일인지 근본적인 성찰이 이 국면에서 필요하다고 하겠다. 등록금 인하 문제로 촉발된 이 정치적인 것의 분출은 궁극적으로 대학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제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논쟁은 '사회주의 vs. 자유주의'처럼 보이지만, 진중권의 칼럼이 명쾌하게 보여주듯, 사실은 '근본주의 vs. 실용주의'이다. 물론 여기에서 근본주의나 실용주의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맥락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실용주의'는 이명박 정부가 내걸고 있는 '중도실용노선'과 전혀 관계가 없다.

김규항은 80년대의 용어법으로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진중권의 노선은 사민주의를 지향하면서 방법론적으로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가깝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도 현실에서 타당성을 갖지 않으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주장에 짙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김규항은 사회주의라는 원칙에 충실해야한다는 '믿음'을 강고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에 가깝다. 근본주의와 실용주의가 싸우면 실용주의가 이긴다. 이게 역사의 법칙이었고, 이런 측면에서 논쟁의 추이는 진중권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다.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사민주의 vs. 자유주의'가 아니라 포괄적으로 근대주의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점에서 진중권이 주장하는 '시민상식'도 근대주의적 기획에 대한 요청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주의적 정치기획'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이다. 사민주의가 오고 사회주의가 오는 게 아니라, 근대주의적 기획 내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다른 체제'가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도전>이나 <남자의 자격> 같은 형식이 예능프로그램의 주종을 이루게 된 까닭은 열악한 한국의 방송제작 환경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값싼 제작비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식간에 엔터테인먼트의 효자종목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청년실업과 4000원 인생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삶’의 사회는 예능프로그램조차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하루벌이에 쫓기는 ‘서민들’에게 예능프로그램은 ‘놀면서 돈 버는’ 계급에 대한 재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중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중문화가 이런 변화를 눈치 채지 않을 수는 없다. 예능프로그램은 더 이상 농담하며 소일하는 ‘잉여인간’을 마음 편하게 보여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현실은 심각해졌고, 그래서 이들 프로그램은 ‘예능감’에 충만했던 과거의 과장법을 버리고, 리얼리티 TV 형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도가니>는 익히 알려진 권력의 비리를 ‘범죄’의 프레임으로 새롭게 설정한다는 점에서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프레임의 도입 효과는 확실하다. 권력이라는 애매한 관계의 메커니즘이 성도착증에 빠진 변태의 범죄행위로 선명하게 의미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권력의 비리는 구조적 모순이라는 추상성에서 비정상적 개인이라는 구체성으로 내려앉는다. 이 구체성이야말로 평균적인 수준으로 살아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준시민들’에게 안전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 대한 공포를 환기하는 요소이다.

한국 사회에서 변태는 섹슈얼리티의 통제를 벗어난 비정상성을 의미한다. 가족재생산을 위한 ‘건전한 남녀관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범죄자가 바로 변태이다. 변태라는 말은 건전한 성인 남녀의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용어이다. <도가니>는 이런 변태에 대한 규정에 악마적인 요소와 사회적인 계급성을 덧입혔다는 점에서 더욱 자극적인 결론을 만들어낸다. 또한 허구가 아닌 실화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영화 속 변태의 존재는 곧바로 나와 가족의 안전에 대한 현실적 위협으로 밝혀진다. 나와 가족의 안전이 위기에 처했는데 국가와 법은 손 놓고 있다는 인식이 시민들의 공포를 실감나게 만드는 것이다. 2008년 촛불과 유사한 상황이 유령처럼 귀환하고 있다.

<도가니>가 불러일으킨 감정의 소용돌이는 이런 비정상적인 것을 방치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이다. 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요청은 사법제도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면서, “법보다 주먹”이라는 한국적인 정의의 실현을 촉구하게 된다. 영화 <아저씨>는 바로 이런 요구에 대한 우파적인 화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가니>를 통해 표출된 시민들의 공분은 특별하다고 볼 수 없지만, 그 공분을 구조적 모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낼 방안에 대한 고민은 시급하다고 하겠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사회문제가 결코 몇몇 나쁜 변태들로 인해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생활의 달인>은 세계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과거의 잔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애잔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이 달인들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서 멸종 동물을 다루는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다.

. ‘고고한 천상’에 노닐던 예술가가 생활인으로 전락하는 전도된 영웅서사에 한국 사회는 쉽게 감동을 받는다.

김종서를 비롯해서 김태원에 이르기까지 이런 영웅서사를 만들어온 이들은 익히 존재했다. 과거에 청춘스타였던 노주현이나 한진희 같은 배우들이 코믹연기를 펼치면서 ‘망가지는 모습’도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한 반감이 상존한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이지아-서태지 소송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근육이 드러나지 않는 가녀린 몸매와 소녀 같은 얼굴을 한 여성에 대한 선호는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구조가 19세기적 고전주의에 멈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성이 공동체의 몫을 배당 받는 구성원으로 인정 받으려면 누구의 엄마이든지, 아니면 아내여야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여성은 소녀나 여동생으로 남아 있어야하는 것이지,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 주변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라는 발화구조는 이와 같은 현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지옥’은 누구나 만물박사처럼 굴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해대는 인터넷 폐인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블로그와 트위터에서 자신의 견해들을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 검색이라는 무소불위의 수단이다. 이런 검색을 통해 획득하는 정보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지식으로 둔갑해서 고정불변한 상식으로 자리매김한다. 인터넷 백과사전이 종이 백과사전을 능가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연하게도, 힘들게 종이책을 뒤져볼 필요도 없이, 간편하게 인터넷을 검색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로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 신속한 일이다.

문제는 검색에 잡히는 정보라는 것이 대개 일차적이고 단편적이라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개연성을 구성하게 되는데, 대개 이런 주관적 판단은 평균적인 상식에 근거한 다른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진실성’을 인준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오히려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들의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깔려 있는 지식은 말 그대로 얇고 얕은 정보의 조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사정과 달리,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긁어온 정보의 조각들을 박식함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어떤 주장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근거도 자신의 독서에 근거하기보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풍문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공통의 인식 기반이 전제되지 않는 인터넷의 속성으로 인해 파편적인 정보에 기초한 지식생산은 끼리끼리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겉으로 다양하고 민주적으로 보이는 인터넷 공간이라는 곳이 사실상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담합하는 장소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Posted by 간서치. Trackback 2 Comment 0